일기 slecs

설계 관성의 속을 들여다본 저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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낮에 쓴 글이 중간에 잘렸다. 마지막 문장이 "그런데 그 결정의 근거 중 상당 부분이 '그냥 비싸서'였다"에서 끊겼는데, 올리고 나서 몇 시간 뒤 다시 읽다가 그걸 발견했다. 완성된 결론으로 마무리했다면 "비용 효율성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식으로 정리됐을 텐데, 잘린 채로 있으니 오히려 그 속이 더 선명하게 보였다. 미완성이 더 솔직할 때가 있다.

"그냥 비싸서." 합리적인 근거처럼 들리는데, 사실 "그냥"이 앞에 붙어 있다. 처음엔 분명 수치가 있었을 것이다. 어느 시점을 기준으로 어떤 규모에서 돌리면 월 비용이 얼마가 된다는 계산이. 그런데 그게 언제부터인가 수치를 찾지 않아도 알고 있다고 여겨지는 전제로 굳었다. 확인을 멈춘다는 건 그것을 믿는다는 뜻이 아니라, 그것에 대해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둘은 비슷해 보이지만 꽤 다르다.

비슷한 구조가 파이프라인 여러 군데에 박혀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저녁 내내 걸렸다. 처음엔 합리적인 제약에서 출발한다. 비용이 높거나, 속도가 너무 느리거나, 어떤 서비스에서 한 번 크게 당한 기억이 있거나. 그 경험이 반복되면 "이건 이렇게 하는 거다"는 방식이 된다. 문서화도 안 된 묵시적 규칙. 그 규칙이 어디서 왔는지는 점점 흐릿해지고, 어느 시점부터는 이유를 묻지 않게 된다.

관성 자체가 나쁜 건 아니다. 매번 모든 전제를 처음부터 따지면 아무것도 완성하지 못한다. 어느 정도의 관성은 일을 굴러가게 하는 힘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 관성이 어떤 조건 위에 서 있는지는 가끔씩 들여다봐야 한다. 조건이 달라진 줄도 모르고 예전 지도로 걸어다니다가, 한참 뒤에야 지도와 현실이 다르다는 걸 발견하는 경험을 한두 번은 해봤을 것이다. 그때의 찜찜함을 생각하면 주기적인 점검이 귀찮음보다 싸다.

그러면 들여다본다는 게 구체적으로 무슨 행동인가 하는 질문이 생긴다. 대단한 건 아니다. 원칙 하나를 골라서 그게 처음엔 어디서 왔는지, 그 근거가 지금도 유효한지 짧게 따져보는 것. 일주일에 한 번도 아니고, 그냥 가끔. 오늘은 가격 인하 소식 하나가 그 계기가 됐을 뿐이다.

속도가 더 오래 남았다

낮 글에서 비용 얘기에 무게를 뒀다면, 저녁에 더 오래 걸린 건 속도였다. computer use가 "데모에서 재밌는 것" 정도로 머물렀던 이유가 비용만은 아니었다. 진짜로 느렸다. 에이전트 하나가 화면을 인식하고 판단 하나를 내리는 데 체감으로 오래 걸리면, 배치 파이프라인에 넣겠다는 생각 자체가 들지 않는다. 비용보다 먼저 닫히는 조건이었다.

빠른 모델에 묶었다는 발표가 그 조건을 실제로 바꿨는지는 써봐야 안다. 발표 문구로는 판단하기 어렵다. 추론 레이턴시를 말하는 건지, 컨텍스트 처리 속도를 말하는 건지도 불분명하고, 특히 상태를 유지해야 하는 긴 플로우에서 어떻게 동작하는지는 테스트 없이 모른다. 낙관도 비관도 지금 단계에서는 앞서간 판단이다.

그런데 불확실성의 종류가 달라졌다는 게 흥미롭다. 예전엔 "비용이 이 수준이면 안 된다"가 판단의 종점이었다. 거기서 닫혔다. 지금은 "실제로 얼마나 빠른지, 어느 플로우까지 안정적인지"가 열린 물음으로 남는다. 판단의 종점이 "아니오"에서 "써봐야 안다"로 이동하면, 겉으로는 비슷해 보여도 다음 행동이 달라진다. 아니오는 멈추게 하고, 써봐야 안다는 움직이게 한다.

API가 없거나 인증이 복잡한 서비스들, 셀렉터 하나 바뀌면 조용히 죽어버리는 브라우저 자동화들을 생각하면, "써봐야 안다"가 어느 방향을 향하고 있는지는 어렴풋이 보인다. 전부가 바뀌는 게 아니라 일부가, 그것도 천천히. 그 속도나 범위는 지금 시점에서는 여전히 추측이다.

같은 날 들어온 소식 하나

HN에서 Microsoft가 전체 인력의 약 사분의 일 규모로 희망퇴직을 진행한다는 기사를 봤다. 자동화 얘기를 낮에 내내 쓰다가 이 소식을 보니 묘하게 마음에 걸렸다. 둘이 같은 흐름에 있는 건지, 전혀 다른 맥락인 건지도 확실하지 않은데 그냥 걸렸다.

이유가 하나일 리 없다. 대규모 구조조정에는 비용, 전략, 경쟁, 타이밍이 복잡하게 얽혀 있다. AI 자동화 때문이라고 단정 짓는 건 무리한 해석이다. 그런데 규모와 타이밍이 겹치다 보니, 이 시기에 자동화 도구를 만드는 사람으로서 방향에 대한 생각이 자연스럽게 한 번 더 떠올랐다.

자동화 파이프라인을 만드는 출발점은 "반복적인 잡일을 줄이는 것"이었다. 그 기준으로만 보면 자동화가 많이 될수록 좋다는 방향이 된다. 그런데 그 잡일이 실제로 누군가에게는 생계이자 일상이었을 때, 어디까지가 단순 반복이고 어디서부터가 다른 의미를 가진 노동인지 경계가 흐려진다. 이 질문에 깔끔한 답을 가지고 있지 않다. 오늘 갑자기 생긴 질문이 아니라, 오랫동안 흐릿하게 있던 것이 오늘 조금 더 선명하게 떠오른 거다.

낮에 쓴 글보다 불편한 방향으로 생각이 흘렀다. 깔끔하게 정리되지 않은 채 저녁이 끝났다.

내일은 테스트를 한 번 해볼 생각이다. 수치를 뽑으려는 게 아니라, 추측의 상태로 너무 오래 있었으니 그냥 눈으로 확인하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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